로마 제국 역사를 통틀어 가장 극적이고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이 벌어진 해가 있다면, 그건 238년일 거예요. 솔직히 말하면, 한 해에 다섯 명의 황제가 죽은 건 정말 엄청난 일이었죠. 그 중 네 명은 살해됐고, 한 명은 자결했어요.
3세기의 로마 제국은 이미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는데요. 군인 출신 황제들이 잇따라 나타나면서 제국의 안정성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어요. 238년은 이러한 혼란이 절정에 이른 해로,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여섯 황제의 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238년 로마 제국의 정치 상황
235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자신의 병사들에게 살해되면서 시작된 혼란기. 군인 황제 시대의 첫 황제 막시미누스 트락스의 폭정으로 제국 전역에서 불만이 폭발했습니다.
5명의 황제, 그들은 누구였나?
여기서 아이러니한 점이 있었는데,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반란이 로마 제국 전체를 뒤흔든 거예요. 아프리카 속주의 지주들이 막시미누스 트락스의 과도한 세금 징수에 반발하면서 고르디아누스 1세와 2세를 황제로 추대했습니다.
1. 고르디아누스 1세와 2세 부자
고르디아누스 부자는 로마 역사상 유일한 부자 공동황제였어요. 아버지 고르디아누스 1세는 80세라는 고령이었고,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가 실제 통치를 담당했죠. 하지만 누미디아 속주 총독인 카펠리아누스의 충성파 부대에 무참히 패배하면서, 고르디아누스 2세는 전투에서 목숨을 잃고 고르디아누스 1세는 아들의 죽음을 듣고 자결했습니다. 그들의 통치는 고작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어요.
고르디아누스 1세의 마지막 말
역사가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고르디아누스 1세는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노인이 홀로 살아남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며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2. 푸피에누스
푸피에누스는 다소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었어요. 원래 미천한 출신이었지만 뛰어난 능력으로 집정관과 총독까지 지낸 인물이었죠. 70대의 나이로 황제에 선출되었고, 실제로 막시미누스 트락스를 상대로 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공을 세웠어요. 하지만 공동황제였던 발비누스와의 불화가 결국 그의 운명을 결정지었습니다.
3. 발비누스
반면 발비누스는 로마의 명문가 출신이었어요. 60세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는데, 원로원에서는 그의 행정 능력과 온화한 성품을 높이 평가했죠. 하지만 군사 경험이 부족했던 그는 푸피에누스와의 역할 분담에서 로마의 내정을 담당하게 되었고, 이게 그의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두 황제의 비극적 최후
📅 238년 7월 29일, 로마 시민들이 카피톨 경기장에서 열린 경기에 몰두한 사이를 틈타 근위대가 두 황제를 납치했습니다.
🗡️ 근위대는 두 황제를 '원로원 황제'라며 조롱하면서 고문을 가했고, 결국 그들을 처참하게 처형했습니다.
💀 역사가들은 그들이 "수천 번 난도질 당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얼마나 잔혹했는지를 보여줍니다.
4. 막시미누스 트락스
막시미누스 트락스는 로마 제국 역사상 첫 번째 '군인황제'였어요. 트라키아 출신의 양치기 출신으로, 185cm가 넘는 거구의 몸집과 괴력으로 황제가 된 인물이죠. 3년간의 통치 기간 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엄청난 세금을 징수했고, 이는 전국적 반란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아퀼레이아를 포위했을 때, 그의 병사들은 몇 달째 질겨가는 공성전에 지쳐있었죠. 결국 5월 10일, 그의 부하들이 텐트 안에서 자고 있던 그와 그의 아들을 살해했습니다. 그의 머리는 잘려서 로마로 보내졌어요.
- 막시미누스의 시신은 화장 없이 길가에 버려졌습니다
- 그의 아들 막시무스도 함께 살해되었습니다
- 근위대장 아눌리누스도 같은 운명을 맞았습니다
고르디아누스 3세, 혼란의 유일한 생존자
이 피비린내 나는 한 해 동안 살아남은 건 13세의 소년 고르디아누스 3세였어요. 로마 시민들과 근위대의 지지를 받으며 황제의 자리에 오른 그는,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비극을 지켜봐야 했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역시 244년에 근위대장 필리푸스에게 살해되면서 고르디아누스 가문의 비극은 계속되었습니다.
근위대의 두 얼굴
🛡️ 황제를 보호하는 것이 본래 임무였던 근위대
⚔️ 238년 한 해 동안 3명의 황제를 죽인 권력의 핵심 세력
👑 어린 고르디아누스를 옹립한 것도 이들의 계산이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238년 로마 제국의 혼란에는 여러 원인이 있었어요. 우선 막시미누스 트락스의 과도한 세금 정책이 있었죠. 제국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원로원은 그를 '국가의 공적'으로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전통적 권력 구조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었어요. 원로원의 힘은 약해지고, 군대의 영향력은 커지고 있었죠. 근위대는 이미 황제를 좌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로마 제국의 미래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238년이 남긴 교훈
238년 로마 제국은 정말 아찔한 순간을 보냈어요. 한 해 동안 5명의 황제가 죽고, 제국의 권력 구조가 뿌리째 흔들렸죠. 이 사건은 로마가 '로마의 평화' 시대를 완전히 뒤로하고 '3세기의 위기'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신호였습니다.
결국 고르디아누스 3세도 244년에 살해되고, 이후 로마 제국은 50년간 계속되는 혼란기로 접어들게 됩니다. 군인 황제 시대의 시작을 알린 혼란의 한 해, 238년은 로마 제국이 저물어가는 제국이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죠.
유명한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이 시기를 "제국의 황혼"이라고 불렀어요. 정말 적절한 표현이었던 것 같습니다.
238년이라는 혼란스러운 한 해는 정치권력의 중요성과 안정의 가치를 다시 한번 일깨워줍니다. 로마에서 황제의 자리는 말그대로 목숨을 건 위험한 자리가 되어있었죠. 그리고 이러한 혼란은 결국 395년 로마 제국의 분열과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 238년은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해 중 하나였습니다
- 5명의 황제가 한 해에 죽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 이 중 4명은 살해되었고, 1명은 자결했습니다
- 근위대가 실질적인 킹메이커가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이 사건은 로마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시켰습니다
이상으로 238년 로마 제국에서 일어난 혼란스러운 황제들의 이야기를 마칩니다. 역사는 때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극적인 사건들로 가득 차 있죠. 다음번에는 또 다른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